이글루스 | 로그인  


J양 이야기


어쩐지 엄청 흉몽을 꾸었다 했다. 오함마에 풀스윙으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그럴 거 같다는 조짐은 여러번 봤었지만, 무의식중에 내가 그 추리를 거부했을 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왜냐하면


그녀가 결혼하기 때문이다.







J양과 나는, 청년백수 시절에 만났었다. 그녀는 스튜어디스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나는 갓 제대해서 막 취업전선에 뛰어든 참이었다. H형이 부르는 술자리에 아무 생각없이 나갔던 나는, 그녀에게 한 눈에 반했다. 다음 날 전화 잘못 건 척하며 스리슬쩍 전화를 걸었고(알고보니 그녀는 내 얕은 꼼수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외로웠던 우리는 쉽게 불붙었다.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갔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는 선을 그었다.(심지어는 여행에 가서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갑자기 나를 시험에 들게 하였고, 나는 그녀의 거부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겨우 합격했다. 그리고 그녀는 계획되어있던 1년의 호주 어학연수를 5개월만에 되돌아왔다. 진짜 연애가 시작되었다. 정말 애교 많고 아름다웠다. 눈동자에 별이 박혀있는 듯, 반짝반짝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사당동에서 술을 마시던 어느날, 생리를 하던 그녀와 같이 노래방에 가서 하라는 노래는 안하고 서로의 몸을 부대꼈다. 내 청바지와 그녀의 치마에 빠알간 얼룩이 질 때쯤,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오늘 나와 같이 있어줘. 그 날부터, 내 인생이 바뀌었다. 그녀가 내 위에서 긴 생머리를 쓸어올릴 때면, 정말이지, 여신이 강림한 것 같았다. 그녀의 풍만한 나신은 눈이 부셨고, 배꼽의 피어싱은 날 미치게 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관이, 내 여성관이, 아름다움에 대한 내 기준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집 앞 횟집에서 그녀는 조심스레 결혼에 대해 물었고, 나는 별 생각없이 호탕하게 당연하다고, 걱정말라고 외쳤다. 하지만 결혼을 쉽게 생각한 내가 그냥 바보였다. T군의 일도 있었고,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고, 여차저차하여 결국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한참을 울었다. 극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좀처럼 회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이다. 그녀 때문에 진로를 정했고, 그녀 때문에 그 직장도 들어갔고, 그녀 때문에 내 여성관도 바뀌었고, 그녀 덕분에 연애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난, 아니, 그녀가 없었던 나는 상상할 수 조차 할 수 없다. 그녀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한때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얼마 전에 그녀에게 메세지가 왔었다. 버스에서 보았다고, 잘 지내냐고. 어색하게 몇 마디 나눈 그 대화가 결국 마지막이 되었다. 그녀의 생일때도 문자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넣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한 일이 된 셈이다.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안 좋은 마음도 들긴 하지만, 이건 그냥 나의 남은 미련 탓일 거다.



 

사랑했다. 평생 고마워할께.



안녕 J.

 

by 魔度八 | 2012/02/10 22:14 | 끄적끄적 잡담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